요즘 주변에서 듣는 세상 소식은 그저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뿐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록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도 한여름에 먹는 얼음 동동 떠있는 물냉면처럼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소식들도 있다.
지난해 12월, 우리 자녀 중 한 명이 큰 일을 해내 화제가 됐었다. 변희석군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미국 아이비 리그 8개 명문
대학교 중 하나인 펜실베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헌츠만 프로그램(Huntsman
Programe in International Studies and Business)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수시(early
decision)로 합격한 변 군은 미국 대학입학을 위한 SAT 시험에서 2400만점에 2260점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1971년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해 설립된 명문이다. 특히 변군이 합격한 헌츠만 프로그램은 1년에 45명 밖에는 뽑지 않아 하버드 입학 보다 더 어렵다고 알려진 과정이며 Wharton School of Business과 School of Arts and Sciences에서 복수전공이 가능하다. 특히 와튼 스쿨은 미국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비즈니스 스쿨이며 세계적인 CEO 들을 배출해낸 엘리트 과정이기도 하다.
변군이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뉴질랜드에 유학을 온 것은 8년 전이다. 아버지의 권면이 있어서 유학을 오게 됐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힘든 소위 기러기 아빠의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변군의 아버지는 변군에게 유학을 강력하게 권했고, 아버지의 뜻을 존중해 마침내 뉴질랜드에 유학을 왔다.
변군의 아버지 변재락씨는 IMF로 인해 경영하던 사업을 정리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상황이 호전되면서 다시 사업에 도전해 성공할 만큼 의지가 강했다. 그것은 긴 유학생활 중 단 한 번도 가족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물론 처음엔 기러기 아빠 생활이 힘들었지만 아들이 학교생활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것을 낙으로 삼고 잘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변군의 생각이 무척 대견하고 어른스럽다. 한국에서 힘들다는 말도 없이 묵묵히 가족을 후원하고 있는 아버지와 이곳에 함께 와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 희생을 생각하며 자신을 채찍질했기 때문이다.
그런 변군을 변군의 어머니 이은미씨는 듬직하고 성실한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남편과 떨어져 혼자서 자녀들을 돌봐야 했지만 변군이 듬직한 아들이 되어 주었기에 마음 든든했다. 이씨는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아들이지만 늘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다.
변군이 하버드 보다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는 헌츠만 프로그램에 합격했다고 해서 공부만 열심히 했던 공부벌레는 아니었다.
변군은 학생회장으로서 학교 안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학생회장은 학생과 교사들이 투표해 선출하는데 변군이 당당하게 선출된 것이다. 변군은 학생회장으로서 전남시청과 연계해 한국에서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직접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청소년들의 홈스태이까지 직접 주선할 만큼 꼼꼼하고 추진력 있게 행사를 주관해 좋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국제적인 Habitat for Humanity 을 오세아니아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학생회장으로 있는 학교에 도입해 방학을 이용 뉴질랜드에서 어려운 가정에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펴기도 했다. 뉴질랜드 국내만이 아니라 25명 규모의 자원봉사단을 이끌고 필리핀에 가서 집을 지어주기도 했다.
취미 활동의 일환으로 학교 축구팀에서 주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워낙 축구를 좋아해 운동을 하면서 공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모두 풀었다. 변군이 헌츠만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시험성적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리더십, 진취성, 협동과 봉사정신, 넓은 시야와 세계관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SAT 는 시험보기 약 3년 전부터 준비했다. 학교공부에 충실하면서도 SAT 를 위해 공부할 단계적인 계획들을 세우고 차근차근 공부했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가서도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했고, 심지어 일부러 고시원에 들어가 공부에 집중하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학교공부는 주로 노트를 활용했다. 과목별로 노트를 만들어서 수업시간에 노트에 그 내용을 잘 정리한 후 집에 돌아와 책을 보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시험 기간엔 특별한 공부를 하기 보다는 평소 잘 정리해 놓은 노트를 요약해 그것을 시험을 준비했다. 노트만 있으면 시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통 새벽 1시쯤 취침할 때까지 공부를 했는데, 방과 후에 집에 돌아와 꼭 1시간 정도 낮잠을 자면서 부족한 수면을 보충했다.
처음 뉴질랜드에 유학을 와서 한인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주로 현지인 학생들과 어울리며 영어를 익혔다. 물론 한인 학생들로부터 욕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은 영어에 승부를 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 있게 영어공부에 매진해 빠른 진보가 있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와튼 스쿨은 오래 전부터 진학하고 싶었던 곳이다. 3년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탐방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그 당시 변군은 할아버지께 반드시 와튼 스쿨에 합격해서 그곳에 다시 오는 것을 보여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게 되어 너무 기뻤다.
입학 후 비즈니스와 국제학을 함께 전공할 계획인 변군에게는 큰 꿈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에서 경험을 쌓은 후 한국으로 돌아가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IMF로 어려움을 겪고 다시 재기하기까지 가까이서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한국의 중소기업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다면 정부의 재정경제부에서 일하면서 국제적인 금융위기의 여파로 휘청거리는 한국 경제를 다시 살리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은 것이다. 한국을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성장시켜 홍콩과 같이 아시아의 financial Hub로 만들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변군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유학 온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를 물었을 때, 변군은 다시 부모님 얘기를 꺼냈다. 혼자 유학을 와 부모님의 수고도 모르고 공부는 뒷전인 채 허송세월을 보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유학을 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는 없는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국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공부에 열심을 내면 좋겠단다.
특히 자신처럼 미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면 SAT를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닥쳐서 공부하기 보다는 미리 장기적인 관점에서 목표를 세우고 그에 따라 단계적인 실천목표들을 세운 뒤 하나씩 꼼꼼하게 실천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12월 13일 합격 소식을 접한 변군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연락을 받은 변군의 아버지도 전화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변군의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 소식을 듣고 그 동안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을 다 잊어버렸을 정도로 기뻤다”고 소감을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꼭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물었을 때. 변군은 서슴없이 “기러기 아빠로 고생하신 아버지와 늘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저 스쳐가는 형식적인 인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인터뷰 내내 변군이 부모님을 향한 고마움을 표현할 만큼 각별한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엘리트로 나아가는 첫 관문에 서게 됐지만 결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엘리트가 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어주기를 당부하는 마지막 말에 변군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그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그 미소 같은 존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1971년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해 설립된 명문이다. 특히 변군이 합격한 헌츠만 프로그램은 1년에 45명 밖에는 뽑지 않아 하버드 입학 보다 더 어렵다고 알려진 과정이며 Wharton School of Business과 School of Arts and Sciences에서 복수전공이 가능하다. 특히 와튼 스쿨은 미국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비즈니스 스쿨이며 세계적인 CEO 들을 배출해낸 엘리트 과정이기도 하다.
변군이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뉴질랜드에 유학을 온 것은 8년 전이다. 아버지의 권면이 있어서 유학을 오게 됐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힘든 소위 기러기 아빠의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변군의 아버지는 변군에게 유학을 강력하게 권했고, 아버지의 뜻을 존중해 마침내 뉴질랜드에 유학을 왔다.
변군의 아버지 변재락씨는 IMF로 인해 경영하던 사업을 정리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상황이 호전되면서 다시 사업에 도전해 성공할 만큼 의지가 강했다. 그것은 긴 유학생활 중 단 한 번도 가족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물론 처음엔 기러기 아빠 생활이 힘들었지만 아들이 학교생활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것을 낙으로 삼고 잘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변군의 생각이 무척 대견하고 어른스럽다. 한국에서 힘들다는 말도 없이 묵묵히 가족을 후원하고 있는 아버지와 이곳에 함께 와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 희생을 생각하며 자신을 채찍질했기 때문이다.
그런 변군을 변군의 어머니 이은미씨는 듬직하고 성실한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남편과 떨어져 혼자서 자녀들을 돌봐야 했지만 변군이 듬직한 아들이 되어 주었기에 마음 든든했다. 이씨는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아들이지만 늘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다.
변군이 하버드 보다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는 헌츠만 프로그램에 합격했다고 해서 공부만 열심히 했던 공부벌레는 아니었다.
변군은 학생회장으로서 학교 안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학생회장은 학생과 교사들이 투표해 선출하는데 변군이 당당하게 선출된 것이다. 변군은 학생회장으로서 전남시청과 연계해 한국에서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직접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청소년들의 홈스태이까지 직접 주선할 만큼 꼼꼼하고 추진력 있게 행사를 주관해 좋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국제적인 Habitat for Humanity 을 오세아니아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학생회장으로 있는 학교에 도입해 방학을 이용 뉴질랜드에서 어려운 가정에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펴기도 했다. 뉴질랜드 국내만이 아니라 25명 규모의 자원봉사단을 이끌고 필리핀에 가서 집을 지어주기도 했다.
취미 활동의 일환으로 학교 축구팀에서 주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워낙 축구를 좋아해 운동을 하면서 공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모두 풀었다. 변군이 헌츠만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시험성적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리더십, 진취성, 협동과 봉사정신, 넓은 시야와 세계관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SAT 는 시험보기 약 3년 전부터 준비했다. 학교공부에 충실하면서도 SAT 를 위해 공부할 단계적인 계획들을 세우고 차근차근 공부했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가서도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했고, 심지어 일부러 고시원에 들어가 공부에 집중하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학교공부는 주로 노트를 활용했다. 과목별로 노트를 만들어서 수업시간에 노트에 그 내용을 잘 정리한 후 집에 돌아와 책을 보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시험 기간엔 특별한 공부를 하기 보다는 평소 잘 정리해 놓은 노트를 요약해 그것을 시험을 준비했다. 노트만 있으면 시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통 새벽 1시쯤 취침할 때까지 공부를 했는데, 방과 후에 집에 돌아와 꼭 1시간 정도 낮잠을 자면서 부족한 수면을 보충했다.
처음 뉴질랜드에 유학을 와서 한인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주로 현지인 학생들과 어울리며 영어를 익혔다. 물론 한인 학생들로부터 욕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은 영어에 승부를 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 있게 영어공부에 매진해 빠른 진보가 있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와튼 스쿨은 오래 전부터 진학하고 싶었던 곳이다. 3년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탐방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그 당시 변군은 할아버지께 반드시 와튼 스쿨에 합격해서 그곳에 다시 오는 것을 보여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게 되어 너무 기뻤다.
입학 후 비즈니스와 국제학을 함께 전공할 계획인 변군에게는 큰 꿈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에서 경험을 쌓은 후 한국으로 돌아가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IMF로 어려움을 겪고 다시 재기하기까지 가까이서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한국의 중소기업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다면 정부의 재정경제부에서 일하면서 국제적인 금융위기의 여파로 휘청거리는 한국 경제를 다시 살리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은 것이다. 한국을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성장시켜 홍콩과 같이 아시아의 financial Hub로 만들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변군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유학 온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를 물었을 때, 변군은 다시 부모님 얘기를 꺼냈다. 혼자 유학을 와 부모님의 수고도 모르고 공부는 뒷전인 채 허송세월을 보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유학을 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는 없는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국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공부에 열심을 내면 좋겠단다.
특히 자신처럼 미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면 SAT를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닥쳐서 공부하기 보다는 미리 장기적인 관점에서 목표를 세우고 그에 따라 단계적인 실천목표들을 세운 뒤 하나씩 꼼꼼하게 실천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12월 13일 합격 소식을 접한 변군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연락을 받은 변군의 아버지도 전화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변군의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 소식을 듣고 그 동안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을 다 잊어버렸을 정도로 기뻤다”고 소감을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꼭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물었을 때. 변군은 서슴없이 “기러기 아빠로 고생하신 아버지와 늘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저 스쳐가는 형식적인 인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인터뷰 내내 변군이 부모님을 향한 고마움을 표현할 만큼 각별한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엘리트로 나아가는 첫 관문에 서게 됐지만 결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엘리트가 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어주기를 당부하는 마지막 말에 변군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그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그 미소 같은 존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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